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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합시다/역사속 인물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by oceanyumi 2017.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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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당나라 744년 봄,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난 이백(李白)은 동쪽을 향했으며, 그해 여름 낙양에서 두보(杜甫)를 만나게 되는데,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시인의 만남은 중국 문학역사에서도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한 이상향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옮기길 즐겼던 이백과는 달리 두보는 자신의 비극적인 생활과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보고 들은 비참한 인간사와 몰락하는 나라의 비운을 시로 옮겼던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백(李白),두보(杜甫), 중국시인



어려서 부터 시를 잘 지었던 두보(杜甫)는 7세때 이미 "봉황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한 신동이었는데, 하지만 관직운이 없어 과거를 볼 때마다 매번 낙을 하였고 때문에 그의 생활을 매우 궁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엔 관직에 오르긴 했지만 안녹산의 난에 휘말려 장안에 묶여 있으면서 백성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직접 목격하고 이것을 시로 승화시키게 됩니다. 두보의 시 중 "주문에는 주육 냄새가 진동하는데 길거리에는 동사한 시신들이 뒹굴고 있구나"라는 대목은 당시의 참혹한 일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백(李白),두보(杜甫), 중국시인



두보(杜甫)는 당대의 시인들에 대해 시를 써서 칭찬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이백(李白)을 두고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말의 술로 시 백 수를 짓고, 장안 시중의 술집에서 잠을 자며, 황제가 불러도 가지 않고, 스스로를 주정뱅이 신선이라고 부른다,". 이 한마디로 이백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두보는 이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백이 열한 살이나 많고 서로 만났을 당시에는 이미 명성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두보가 이백을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겼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숙종 때 두보는 다시 관직에 오르지만, 직언을 하는 바람에 왕의 미움을 받게 되어 다시 방랑하게 되고, 770년에 끝내는 양쯔 강 페선에서 객사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백(李白),두보(杜甫), 중국시인




두보의 시는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에 담겨 전해지고 있는데 고시(古詩)와 율시(律詩)가 가장 아름답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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